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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황제보다 강한 환관의 권력 집착과 그의 최후-

[이상수 전)호남대교수]

 

권력이란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말한다.

권력이 집중하면 그만큼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권력의 영향력이 커지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에 의사결정의 일방성이 높아질 것이다. 의사결정의 일방성이 높아지면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어 경제가 파탄나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국민들 삶의 질이 저하될 우려가 많아진다. 권력은 항상 정량적인 불변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니 피권력자가 영향을 받지 않으려한다면 권력은 무의미하다.

 

중국사 중 명나라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다. 황제의 주변에 군림하는 환관들의 사례를 보면 그 폐해를 알 수 있어 본란에서는 그 예 중 하나를 소개하여 우리 사회의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한다.

 

명대에 와서 황제의 권력은 비대해졌는데, 그 부산물로 환관의 간헐적 득세가 초래됐다. 그 중에서도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등장으로 3백년 역사의 명왕조는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에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위충현은 1568년 허베이(河北)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진충(李進忠)이었다. 도박으로 인한 빚으로 말미암아 도망 중에 있던 그는 스스로 관가에 자수하여 궁형(宮刑), 즉 거세형을 받았다. 그는 남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자 명나라 13대 신종(만력 萬曆, 1572~1620) 재위기간에 궁에 입궐했다. 이때 성도 이(李)씨에서 위(魏)씨로 바꾸었다.

 

궁중에 환관으로 들어온 위충현은 이름도 15대 명희종(憙宗, 천계제, 1620~1627)이 ‘현명한 충신’이 되라는 뜻으로 하사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위충현은 명희종의 유모 객씨(객인월, 客印月)와 가까이 지냈으며, 명희종이 16세에 즉위한 후 이들 환관과 유모는 황제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명희종은 1620년 부왕 태창제가 즉위한 지 29일 만에 갑자기 죽자, 그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올랐다. 태창제의 복잡했던 황위 계승 과정에서 소외되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즉위했을 때 목공만 잘하고 글은 한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의 취미인 목공에만 시간을 보내고 정사에는 관심이 없어 환관 위충현에게 모든 것을 맡기었다. 명희종은 자신의 문맹에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숭정제가 되는 동생 주유검의 교육에는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명희종의 생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유모 객씨의 손에 자라게 된다. 유모에 각별한 정을 느꼈는지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 특히 요리를 잘했다고 하는데 명희종은 궁중에서 하는 음식보다 객씨의 요리를 더 좋아했다.

 

객씨는 황후처럼 가마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집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많은 종을 거느렸다. 자신의 측근들을 궁에 들였고 그들은 객씨를 받들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구나 객씨는 내연남이 있었으니 바로 환관 위충현이었다. 위충현하면 나라 말아먹은 한관들 중 손에 꼽히는 자이다.

 

명나라 황제들은 초기부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관을 적극 활용했다. 위충현의 경우와 같이 원래 환관은 비천한 집안의 출신들로서 궁정의 일상사를 처리하기 위해 남자의 성기능을 제거한 상태에서 궁에 들어갔다. 대를 잇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유교사상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의 눈에 그들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환관 위충현은 마침내 환관들의 조직인 사례감(司禮監:중국 명나라 때 환관의 최고 관청)의 최고 위직인 병필태감(秉筆太監)에 올랐다. 이 자리는 조정에서 올라온 건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황제의 정식 명령으로 확정지을 때 붉은 묵으로 비준을 표시하는 직책이었다. 그런 권력을 지닌 병필태감 위충현은 황제가 부재중이거나 정사에 소홀할 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벌써 이때만 하더라도 환관은 조정의 내각대신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권력이 비대해 있었다.

 

환관 위충현이 권력의 상부에 오른 후 대신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자,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황제에게 아무래도 시골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위장 전술을 펴니 무능한 황제는 “그럼 더 힘을 실어 주겠다”고 하니, 위충현은 “저에게 ‘동창(東廠)’을 맡겨 주시옵소서”라고 청하니 황제는 “너에게 동창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동창은 중국 명나라 때의 정보, 첩보 기관이다. 영락제 때에 처음으로 창설되어 황제 직속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주로 환관들이 동창을 책임지고 관리하였다. 예전 국정원 같은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위충현은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동시에 맡은 격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 대신들 사이에서 위충현에 대한 비난을 하게 되면 궁내에 깔린 내시들에게 발견되어 대부분 위충현에게 보고되어 당사자는 보복을 받게 되었다.

 

위충현은 아첨이 대단하여 명희종과도 가까워졌는데다 객씨와는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기에 명희종과 유모 객씨의 마음을 사로잡고 권력을 손에 쥐었으며 자신의 반대 세력을 숙청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황제가 사치와 방탕에 빠지도록 계속 손을 썼다.

 

어느 날 귀비 풍씨가 황제에게 가까이 하자 그날 밤 귀비 풍씨에게 찾아가 폐하께 너무 기대지 마십시요!“ 라고 말하자 귀비 풍씨가 환관을 꾸짖자 위충현은 황제의 여인 풍씨까지 폭력으로 사살시킨 후 황제에게는 ”풍씨가 죽은 것은 황후 장씨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안 귀비 풍씨가 상실감이 커 자살을 한 것으로 압니다.“라고 보고하고 조용하게 무마시켜버렸다.

 

그런 일이 있는 후 황후 장씨는 “폐하 닮은 사내아이를 폐하께 안겨드려 태감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것이다.” 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은 위충현은 힘은 한곳으로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기에 황후 장씨에게 탕약 속에 유산을 하게끔 약을 넣어 마시게 하여 명희종의 유모와 함께 후사를 보지 못하도록 유산을 시켰다.

 

명희종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장악한 그는 황제를 더욱 사치와 방탕에 빠지도록 애썼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 붕당을 결성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배양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모든 상소문은 황제의 손에서 처리되지 않고 위충현에 의해 결제가 이루어졌다.

 

그가 외출할 때는 사대부들이 길에 배열해 절했으며, 모두 큰소리로 “구천살까지 사십시요!”를 외쳤다. 심지어 전국 각지에서 살아있는 위충현을 위해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무릎꿇고 참배하는 무리가 줄을 이었다, 어떤 학자는 그와 공자를 비유하기조차 했다.

 

명희종은 1620년 황위에 올랐고 1626년까지 6년간을 위충현 환관이 섭정하였으며 1626년부터 1627년까지 1년간 친정d을 펼치었으나 사실상 재위 시절 대부분을 환관 위충현에게 정치를 모두 넘긴 상태이기에 큰 변화는 기대할 수 없었고,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뇌물이 끊이지 않고 간신들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그러나 영원한 권력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명희종이 몸에 병이 났다. 위충현과 객씨는 애가 탔다. 아직 누릴 것이 더 많은데.... 좋은 약을 써도 나을까 말까한 마당에 어의를 무시하고 위충현의 심복이 구해 온 ‘영로음(靈露飮)’이라는 약을 먹인다. 당연히 효과는 없고 명희종은 스물셋의 나이에 죽고 만다. 환관 위충현의 권력도 주군인 명희종이 7년만에 갑자기 죽자 그동안 하늘처럼 높았던 그 기세는 자기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명희종의 뒤를 이어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즉위를 했다. 위기를 느낀 객씨는 궁을 떠나겠다고 숭정제에게 요청했다. 어쩌면 명희종이 없는 궁은 의미가 없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유모인 객씨는 궁을 떠나 가 전 명희종의 영정에 가서 어릴 적 명희종의 머리카락, 손톱, 이빨 등을 태웠다. 생모가 아닌 유모임에도 이런 것을 모아둔 걸 보면 명희종에 대한 애정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객씨는 곤장을 맞아 죽고 재산은 몰수 되었다. 한편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된 위충현은 목을 매 자살을 한다. 그런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다.

 

환관 위충현이의 사례를 보듯이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공유가치(신뢰, 정직, 진실, 정의, 공정, 공평, 상식 등)를 지니지 못하고 무능하면 고위 권력층에 있는 자들의 국민들에 대한 횡포는 늘어나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지게 되며, 국가 재정은 파탄 나게 된다.

 

사마천은 사기(화식열전)에 “가장 좋은 정치는 자연적인 추세에 순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으로써 인도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그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억압적 수단으로써 정돈하여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가장 나쁜 정치는 백성과 다투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국민들의 뜻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아집으로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 이롭게 정책을 펼친다면 국민들은 그러한 권력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은 권력을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다. 쇠퇴하는 조직의 특징도 지도자들의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각자 도생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들이 국가가 망하는 전조증상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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